제로인 제독 6화 : 롱빌의 사정


6화 : 롱빌의 사정


롱빌은 그의 말에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양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상반신을 오므리고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면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어째서 제가 푸케라는 건지, 이유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양도 천천히, 말을 고르기라도 하듯이 대답했다.

“뭐, 우선은…… 여기에 왔다는 게 이유로군요. 나한테 어지간히 볼일이 없는 한, 이런 비상시에 불렀다고 순순히 왔을 리가 없지요.”
“어머머? 보물 창고의 케이스 속에 있는 『파괴의 항아리』 를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는 당신이 어떻게 그 문양을 알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왔을 뿐이에요.”
“과연, 그건 그렇게 둘러댈 수도 있겠군요.”

롱빌은 생긋이 웃어 보이며 반론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리고 양에게서도 이미 평상시의 멍청한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좀 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괜찮으실지? 그리고 만약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사양 말고 말씀해 주세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 마법이나 이 나라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시작하세요.”

롱빌의 재촉에 양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던 건 『어떻게 푸케가 도끼를 훔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발리에르 가의 장녀가 탄 마차에 도끼가 실려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요? 아무래도 푸케는 신출귀몰하니까요.”

롱빌은 딴청을 부리는 양 어깨를 추켜올리며 몸을 움츠렸다.
양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건 푸케가 왕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궁에서 엘레오놀 씨가 도끼를 가져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습격할 수 있었던 거죠.”
“어머, 그럼 푸케는 미리 왕궁에 숨어들어 있었던 거군요?”
“네, 말씀대롭니다. 그리고 왕궁을 나선 엘레오놀 씨의 마차를 남몰래 뒤쫓았던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양에게 그녀는 대담하고 겁 없는 미소를 띄우며 반론한다.

“하지만, 어쩌면 왕궁에 숨어들어갔던 건 푸케의 사역마 뿐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사역마와 감각을 공유해서 도끼를 가진 사람을 보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원견 (遠見, 역자 주 : 먼 곳을 봄)』 의 마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죠.”

그 반론에 양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나 우리가 도끼를 언제, 어디로 가져갈 것인지 까지 미리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미스 발리에르와 전 요전 날 저녁 무렵에 느닷없이 왕궁에 불려갔던 거니까요. 도끼를 넘겼던 방에 사역마처럼 보이는 생물은 없었습니다. 도끼를 케이스에서 꺼낸 건 그 방에 있을 때 뿐이었고요.”
“그래도 뭐… 왕궁 깊숙한 곳까지 잠입해 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겠죠.”

롱빌은 팔짱을 끼고 양의 추리에 코웃음을 쳤다.

“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 경우에 푸케는 왕궁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거나, 그게 아니면 왕궁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하지만 그래서는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남습니다.”
“뭐가… 말이죠?”

롱빌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푸케는 도끼를 빼앗은 바로 다음 날에 학원을 습격하고 『파괴의 항아리』 를 훔쳐갔습니다. 이건 어째서일까요?”
“글쎄요… 영문을 모르겠는걸요?”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은 롱빌은 방심하지 않고 양의 모습을 응시한다.

“학원에서 왕궁에 가는 도중에 당신 스스로 이야기했었죠? 푸케가 노리는 건 『귀족이 가진 강력한 마법이 부여된 매직 아이템』 이라고. 내가 가진 도끼는 마력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소유주인 저는 평민입니다. 보통 푸케가 타겟으로 삼는 대상에서 벗어나 있죠. 결국 푸케가 정말로 노리고 있던 건 『파괴의 항아리』 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도끼를 훔칠 이유는 없었죠.”
“하지만 푸케는 실제로 도끼를 훔쳐갔잖아요?”
“네, 훔쳐갔죠. 그 도끼의 소유자가 저에서 발리에르 가, 아니, 트리스테인 왕가로 바뀌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그리고 다음 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학원을 덮쳤습니다. 즉, 푸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도끼를 발리에르 본가나 왕궁에 팔아 넘기는 걸요. 우리들과 줄곧 함께 학원에서 성으로 가면서 말이죠. 아마 그 도끼를 골렘에게 휘두르게 해서 보물 창고의 벽에 구멍을 뚫었겠죠. 도끼를 훔친 건 보물 창고를 부수는 데 쓰기 위해서였을 테니까요.”
“저런, 그거 이상하네요. 조금 전에 당신은 『푸케는 왕궁에 있다』 고 말하지 않았나요?”

킥킥거리며 웃지만, 변함없이 눈은 웃지 않는 롱빌.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받아내면서도 양은 아무렇지 않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네, 맞아요. 문제는 『푸케는 왕궁과 학원 중 어느 쪽에 있었는가?』 하는 거죠. 어떻게 생각해 봐도 학원과 왕궁 양쪽에 있어야만 도끼를 훔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왕궁에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면 학원의 당직 교사가 늘 방심하고 있으며, 밤에는 당직을 서지 않고 잠이나 퍼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겠죠. 보물 창고가 위치한 곳이나 벽의 강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고요. 하지만 푸케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끼를 훔치고 당당히 학원의 벽을 부수고서 『파괴의 항아리』 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푸케는 학원과 왕궁 양쪽에 있었던 인물이 되겠죠.”

롱빌은 입가만 움직여 미소 짓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가슴께에 놓아둔 자기의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그래도 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고 있는 건 오직 입 뿐이었다.

“학원에 있던 인물 중에 도끼의 행방에 대해서, 왕궁의 방 안에서 도끼의 소유주가 바뀌었다는 사실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셋뿐입니다. 나하고 루이즈, 그리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성까지 따라왔던 당신이죠. … 미스 롱빌. 아니, 『흙더미의 푸케』 씨.”

푸케의 지팡이가 양에게 똑바로 내밀어졌다.
양을 바라보는 눈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다.
그런데도 양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지팡이가 눈에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입을 연다.

“이제 반론은 그만둔 건가? 그거 말고도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나 예전에는 학원에서 일했었지만 지금은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도 있는데? … 뭐, 한 없이 낮은 가능성이겠지만.”
“시끄러워! 아아, 그래… 내가 『흙더미의 푸케』 다! 자, 그럼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비서는 지적인 얼굴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리고는 분하다는 듯 독설을 퍼부었다.

“그럼 됐군. 이제 당신이 푸케라는 게 증명되었으니 순순히 항아리와 도끼를 돌려줬으면 하는데.”
“싫다… 고 한다면?”

살의를 머금은 미소가 단정한 여인의 얼굴을 뒤틀리게 한다.

“그렇게 되면 뭐 어쩔 수 없지.”

양은 푸케의 눈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쫓아가지 않을 테니까 도망쳐도 돼.”
“뭐!??”

푸케의 입은 크게 벌어진 채 닫힐 줄 몰랐다.
다시 한 번 충분히, 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쪼, 쫓아가지 않을 테니 도망치라니… 당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당연하지. 잘 생각해 보라고. 내가 너랑 열심히 싸운 끝에 붙잡아서 항아리랑 도끼를 되찾는다고 해도 무슨 이득이 있지?”
“뭐, 뭐!? 아니, 무슨 이득이 있냐니…”

푸케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양이 자기를 붙잡으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뭔가 자기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거야 왕궁에서 보상금이 나오고, 명예와 명성을 얻고, 그리고… 항아리는 어떡할 건데!? 위험한 물건이라고 해서 이렇게 일부러 돌려받으려고 온 거잖아!? 그리고 도끼도, 그만큼 비싸게 팔릴 물건을 내가 가지고 도망치게 놔둘 리가 없겠지!”

그런 푸케의 곤혹스러움과는 반대로 양은 찬찬히,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보상금이고 명예고 어차피 나한테 떨어질 것들은 아냐. 난 루이즈의 사역마니까 그런 건 모두 루이즈의 것이 되겠지. 그리고 난 그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 아이의 돈과 명예 따위를 위해서 너랑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없어. 물론 루이즈가 내 생명의 은인이긴 해도 치료비는 벌써 배로 갚았고, 발리에르 가의 셋째 따님께 굳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할 리는 없지. 무엇보다 난 평민이라 귀족의 명예 같은 거엔 관심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 스스로가 명예라는 것에 별다른 가치를 느껴본 적이 없기도 하고.”

할케기니아의 상식을 똘똘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듯한 양의 대답을 듣고 푸케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팡이를 쥔 손의 힘도 쭉 빠지고 고개를 숙이고 만다.
대화를 이어간 건 양이었다.

“그리고 도끼 말인데, 그건 너도 알다시피 벌써 왕궁에 팔았어. 이젠 내 것이 아니지. 그러니까 어찌되든 알 바 아냐. 도끼를 도둑맞았으니 왕궁에서 대금을 안 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대금을 받는 건 발리에르 공작 가문이지. 나한테는 작게 떼서 매달 봉급처럼 주어지게 되어 있어. 다시 말해 나한테 돈이 올지 안 올지는 공작 맘대로야. 유감이지만 평민 입장에서 여기에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할 순 없겠지. 확실히 네 말대로 도끼를 되찾는다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얘기긴 해. 하지만 목숨 걸면서까지 그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걸. 오히려 돈이 탐나서 발리에르 가에 발이 묶이지나 않을까 하는 게 내 입장에선 더 큰 문제야. 왜냐면 이미 공작에게 목돈을 받았거든.
그리고 그 도끼는 항아리랑은 달라서 위험한 물건까지는 아니야. 알아서들 팔던가 굽던가 삶던가 맘대로 하라고들 해. 아, 말해두겠는데 그 도끼를 가공할 방법은 나한테 물어봐도 몰라. 그건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해서 만들어진 무기거든. 전장에서 적과 육탄전을 하다가 손에 든 무기가 부서졌다고 하면 절대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연금』 의 마법을 써서 성질을 바꿔버린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마 어지간히 신경 쓰지 않으면 도끼가 다이아째로 펑~ 하고 터져버릴 테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이제는 생글생글 웃으며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는 양.
푸케는 힘이 빠져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항아리 이야기가 남았네. 그거 아까도 말했지만 아주 위험한 물건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말야. 그렇지만 그런 위험한 물건을 무심코 써버리기라도 하면 누구든지 곤란하니까 절대 실수로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한 안전장치가 걸려 있어. 그러니까 웬만한 사람은 쓸 수가 없지. 실제로도 여기에서 그 항아리는 아무도 사용법을 몰라서 장식품 신세였었지? 그럼, 만약에 네가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격으로 우연히 사용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 땐 그 항아리를 사용한 사람이, 즉, 네가 주변의 폭발에 휘말려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야. 결국 넌 그 항아리를 팔 수가 없어. 위험하니까 만지지도 못하겠지. 트리스테인 마법 학원의 비보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물건이 되어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푸케는 양에게 향해져 있던 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럼, 그럼… 당신은 뭐 하러 날 여기로 부른 건데!?”
“널 위해서지. 위험한 물건이니까 어설프게 항아리에 손대지 말라고 충고하러 온 거야.”

그녀의 입이 벌어진 채 닫히지 않는 걸 보면 턱까지도 힘이 빠진 모양이다.

“그럼, 내가 할 말은 끝났으니 이제 도망쳐도 돼. 나는 쫓아가지 않을 테고 다른 사람에게 네가 푸케라는 사실을 말할 생각도 없으니까. 그쪽도 도끼를 얻었으니 이제 수확은 충분하겠지?”

양은 베레모를 고쳐 쓰고는 푸케의 옆을 지나쳐 학원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양의 등 뒤에서 푸케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땅을 밟아 짓이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 거기 서.”

푸케의 목소리에 양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보았다.
뭔가 각오를 굳혔는지 기합을 고쳐 넣고 지팡이를 양에게 들이댄 푸케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라도 있나?”
“있어.”
“흐음, 뭔데?”
“두 가지. 하나는 당신한테서 항아리의 사용법을 캐내면 항아리를 팔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정체를 알아버린 사람을 살려둘 수는 없다는 거야!”

자세를 고쳐 잡은 푸케는 살의를 담아 양에게 지팡이를 들이대었다.
그러나 그래도 양은 푸케에게 등을 돌린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은 무거운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웬만하면 믿어줄 수 없을까?”
“사람이란 언제 맘이 변할지 모르는 동물인 걸.”

양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항아리의 사용법을 캐낸 다음에는 어쩔 건데?”

양의 물음에 푸케는 ‘으윽’ 하고 작게 끙끙거렸다.
푸케를 대신해서 양은 한숨 섞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역시, 죽일 수밖에 없겠지? 그럼, 항아리의 사용법을 알려줘 봤자 나한테 좋을 건 없군.”
“… 그렇다면 당신, 지금 나한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네?”

이번에야말로 푸케는 웃었다. 살의가 담긴 우월감을 띠고서.
양은 상반신만 움직여 슬쩍 푸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냉담하게, 나무라듯이 말을 꺼냈다.

“네가 날 죽인다면 내 시체가 발견되겠지. 만약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테고. 그럼 메이드들이 증언을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분명히 내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있었을 미스 롱빌도 실종되었다는 걸 알게 돼지. 이미 푸케에 의해 연거푸 발생한 발리에르 가 주변의 범행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어. 자, 그러면 나와 같은 추리를 한 사람이, 네 인상착의를 그림으로 그려서 할케기니아 전역에 방을 붙이는 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푸케의 팔에서 다시금 힘이 빠져 지팡이를 든 손이 아래로 쳐지고 말았다.

“그래도 날 죽이고 싶다면 상대는 해 주겠지만… 어떤 마법에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도끼, 그리고 그 도끼와 같은 기술로 만들어진 총의 위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가?”

양의 오른손이 점퍼 왼쪽 가슴 주머니에 넣어진 빔 총에 닿는다.

푸케는 겁을 먹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꼴사납게 주저앉고 말았다.
양은 침착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가서는, 웃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항아리와 도끼, 돌려주겠어?”

푸케는 힘없이 머리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양은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일으켜 주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원으로 걸어가는 양의 뒤를 푸케. 즉, 롱빌이 터벅터벅 따라가고 있다.

“이봐, 당신 말야.”
“어, 뭔데?”

롱빌은 고개를 숙이고는 눈만 위로 올려 떠 양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수고스럽고 위험한 일 벌이지 않았어도 당신이라면 날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거 아냐?”
“으음, 쉽게 잡는 건 아무래도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말야.”

양은 뒤를 돌아보고는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그 도끼에 대해서 가르쳐 줬던 보답으로 이번만큼은 눈감아 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롱빌은 ‘후우우…’ 하고 성대한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학원에 돌아가는 길에 양은 롱빌에게 파괴의 항아리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 『근처에 사는 농민에게 물어서 푸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걸어서 반나절, 말을 타고 네 시간 걸리는 곳에 있는 숲의 폐가에 숨어있던 새까만 로브를 걸친 남자를 발견했어요. 그가 바로 푸케고, 폐가는 푸케의 은신처였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해서 양을 끌어내어 골렘으로 덮쳐 파괴의 항아리의 사용법을 캐물을 생각이었다. ――

라고 대답했다.

롱빌의 말을 듣자마자 양은 대체 무슨 근거로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자가 폐가에 숨어 있다고 해서 그게 푸케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지, 말을 타고 네 시간이나 걸리는 곳의 자세한 정보를 어떻게 하면 다들 일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아침 나절에 손에 넣을 수 있는지 설명이나 좀 들어 보자며 그녀를 계속 놀려대었다.

롱빌은 한층 더 풀이 죽고 말았다.



이런 저런 일이 있고 나서 숲 속으로 푸케 수색대 일행의 짐마차가 달려갔다.
마부는 롱빌이었고, 짐칸엔 루이즈, 양, 퀴르케, 타바사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느긋하게 잡담을 하며 숲 속의 폐가로 향했다.


보물창고로 돌아간 양과 롱빌은, 그녀가 꾸며낸 이야기에 조금 살을 붙여서 교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건 『예전부터 정체불명의 메이지가 드나들고 있던 폐가가 있다고 농민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주변에 거대한 골렘이 목격되었다는 소문도 있고요. 시험 삼아 조사해보지 않겠습니까?』 라는 대단히 애매한 제안이었다.

교사들은 그런 확실치 않은 정보로는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 푸케랑 마주치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대신 푸케를 반드시 잡고 말겠다고 용감하게 지팡이를 치켜드는 루이즈와 발리에르 가문에는 질 수 없다는 퀴르케, ‘걱정.’ 하고 한 마디만 하고는 따라온 타바사, 그리고 양과 롱빌이 가게 된 것이다.

교사들도 그들이 설마 푸케와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파괴의 항아리』 와 도끼를 찾아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조사를 허가했다.


양 일행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숲의 폐가에 도착했다.
폐가 안에서는 어이없게도 『파괴의 항아리』 와 로젠리터의 도끼가 발견되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루이즈, 퀴르케, 타바사는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 하고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양은 재빨리 『파괴의 항아리』 에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금속으로 된 항아리의 표면에는 은하제국군의 문장인,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가 날개를 편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제국 공용어로 이런저런 경고문과 주의사항이 쓰여있다.
그리고 항아리의 위에 있는 밸브와, 안전장치의 전자식 자물쇠와, 자동식 계량기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 양의 모습을 보고 여성 팀은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롱빌이 조심조심 뒤쪽에서 말을 걸었다.

“저, 저기… 괜찮은 건가요? 그 물건은, 대체 뭔가요?”

양은 대답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둥!

하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를 두드렸다.
그 순간 롱빌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목을 움츠리고는 몸을 잔뜩 숙였다. 나머지 세 여학생들은 그녀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푸… 후후 후후…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핫!!”

갑자기 양이 배꼽을 부여잡고는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대체 왜 저러는지 짐작도 못한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말았다.
롱빌이 이번엔 조금 화난 듯이 목청을 높였다.

“이봐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주세요! 그건 대체 무슨 물건입니까!?”

겨우 웃음을 참아낸 양은 항아리를 통통 두드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거 참, 미안 미안. 이건 말이지. 내가 살던 나라에선 탱크라고 불리는 물건이야. 안에는 기체가 들어있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공기나, 전쟁에서 쓸 독가스 같은 거.”

독가스라는 말에 네 사람의 얼굴이 굳어진다.
하지만 양의 표정은 지금도 조금 전까지의 대폭소의 여운이 남아있는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이 탱크에 들어있던 건 공기도 독가스도 아냐. 이쪽 표면에 써있는 문자는 내용물인 기체의 이름과 취급시의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거지. 이 안에 들어있던 기체의 이름은 예상대로 제플 입자였어. 간단히 말하자면 기체 상태로 되어 있는 불의 비약… 즉, 폭약이라고. 이 항아리는 제플 입자를 발생시키는 장치야.”

폭약이라는 말이 튀어나와도 아가씨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할케기니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의 비약이라고 하면 유황이나 화약 같은 물건 정도를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니까.
양의 이야기를 알 듯 말 듯한 루이즈가 수상하다는 듯 양에게 질문했다.

“공기가… 폭발한다는 거야?”
“음, 뭐랄까. 공기가 폭발한다기 보단 화약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쪼개서 공기 속에 퍼뜨려 놨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턱에 손을 대고 양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중인 퀴르케도 질문한다.

“뭐, 당신의 나라에 그런 물건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하고… 그건 어느 정도의 위력인데?”

질문을 받은 양은 과장된 몸짓으로 양 팔을 벌렸다.

“이 부근에 제플 입자를 살포한다면, 이 숲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지.”

양의 말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진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계속 조용했던 타바사가 입을 열었다.

“왜 웃은 거야?”
“간단해! 왜냐면 말이지.”

양은 웃음을 참으며 다시 탱크를 통 하고 두드렸다.

“이거 텅 비었거든!”

아가씨들은 이번엔 눈 뿐만이 아니라 입까지 딱 벌어져 버렸다.

“이 탱크의 내압 표시기가 0을 가리키고 있지? 그리고 안전장치는 이미 풀려서 밸브… 아, 이 항아리의 뚜껑을 말하는 거야. 이게 계속 열려 있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어. 결국 벌써 오래 전에 이 탱크에 들어있던 제플 입자는 전부 새어나가 버린 거야. 지금은 이미… 아니지, 옛날 옛적부터 이건 단순한 쇳덩어리에 불과했던 거라고.”

롱빌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법학원에 잠입하기 위해 했던 그녀의 온갖 노력이, 원장의 성희롱에 견뎌왔던 매일매일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트리스테인 마법학원은 이런 고철 덩어리를 비보랍시고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는 거지.”

화창한 오후의 숲에서 양의 시원스런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빛나는 학원에 다섯 사람을 태운 짐마차가 돌아왔다.

원장실에서 오스만과 콜베르는 그들의 보고를 듣고 『파괴의 항아리』, 즉, 텅 비어버린 제플 입자 발생장치를 돌려받았다. 오스만은 일단 모두 무사히 돌아온 것과 탱크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긴 했다. 그러나 옛날 옛적부터 이 항아리는 텅 빈 상태였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으흠, 푸케는 놓쳤지만 도둑맞은 물건이 되돌아 왔으니 잘 된 일이구먼… 자, 어쨌든 오늘 밤은 『프릭의 무도회』 라네!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함세.”

무도회라는 말을 듣고 눈을 반짝거리는 여학생들은 오스만에게 가벼운 절을 하고는 원장실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나가려 하지 않는 양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 전 원장님께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루이즈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잔뜩 들뜬 표정으로 양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콜베르와 의기소침해진 롱빌은 원장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을 듣고 이미 방에서 나간 뒤였다. 콜베르는 상당히 불만인 모양이었지만.


“그럼, 내게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구먼.”

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걸 어디에서 손에 넣으신 겁니까?”

오스만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건 내 생명의 은인이 남긴 유품이라네. 30년 전, 숲을 산책하고 있던 나는 와이번에게 습격을 당했다네. 그는 항아리의 구멍 같은 부분을 와이번에게 들이대었지. 그러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 와이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네! 그래서 그걸 『파괴의 항아리』 라 명명한 것일세. 하지만 그는 이미 크게 다친 상태였다네. 그 자리에서 금세 쓰러져 버리고 말았어. 학원에서 열심히 간호를 해 봤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결국 죽고 말았지. 그 후 그 항아리는 그를 기념하는 물건으로써 보물 창고에 놓여지게 된 것일세.”
“그렇습니까… 은인의 유품이었군요.”

양은 항아리를 보고 마구 웃어버렸던 무례한 행동을 마음 속으로 사죄했다.
그와 동시에 어째서 밸브를 잠그지 않아 탱크가 텅 비어 버렸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물건을 가져온 사람은 오스만을 구하기 위해 와이번에게 제플 입자를 쏘았으나 상처를 입고 쓰러져 버렸기 때문에 밸브를 제대로 잠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플 입자는 열을 가하면 폭발하지만, 작은 불꽃 정도의 충격으로는 발화하지 않는다. 레이저나 빔포 정도의 온도가 아니면 폭발할 위험은 없다. 오스만을 구했을 때는 와이번이 브레스를 토해냈거나 부상당한 제국군 병사가 총을 쏘았기에 폭발이 일어났던 거겠지.
그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기에 제플 입자도 허무하게 계속 새어 나와 대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오스만은 말을 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죽기 직전까지 잠꼬대 같은 말을 반복했다네. 『여긴 어디야, 어느 별이야, 오딘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말일세. 오딘은 자네 나라의 지명인가?”
“아뇨, 이웃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할케기니아에 온 겁니까?”
“그건 모르겠네. 그가 어떤 방법으로 여기에 온 것인지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네.”
“그렇군요…”

양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서, 오스만은 약간이지만 양을 의심해 보았다.

“그래, 자넨…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겐가?”
“그거야 물론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제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구조대가 온다면 좋겠지만요.”

양의 말을 듣고는 오스만은 주저하면서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있다고 보는가?”
“네, 있습니다. 이제 저 말고도 이 세계에 흘러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어쩌면 제 나라와 할케기니아는 의외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겁니다. 가능성은 충분하죠.”
“그, 그런가…”

오스만의 뺨에는 땀방울이 한 줄기 흘렀다. 그다지 더운 날씨도 아닌데 말이다.

당황한 모습을 무마하려는 듯 오스만은 양의 왼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건 그렇고 자네의 왼손에 새겨진 룬 말이네만.”
“아, 이거 말씀이시군요.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양도 자기의 왼손에 새겨진 룬을 바라본다.

“그건 간달브라고 해서, 전설의 사역마를 뜻하는 증표라네.”
“전설의 사역마?”
“그렇다네. 그 전설의 사역마는 모든 『무기』 를 마음대로 다루었다더구먼. 뭔가 짚이는 곳은 없는가?”
“아뇨, 그다지…”

양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시치미를 뗐다.
솔직히 말해서 룬의 정보는 필요하다. 그러나 양은 비장의 무기가 될지도 모르는 사실을 가볍게 떠벌릴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스만은 ‘험험’ 하고 기침을 했다.

“뭐, 어찌되었든 자네가 소환된 이유나 돌아갈 수단에 대해서는 내 나름대로 조사해볼 생각이네.”
“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양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원장실을 나왔다.



문을 바라보던 원장은 머리를 양 팔로 감싸 쥐었다.

“하아… 뭐가 『아뇨, 그다지』 란 말인가. 콜베르 군에게서 자네가 총을 만지니 룬이 빛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단 말일세. 그렇다고는 하나 감히 우리를 믿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

오스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성희롱을 일삼는 변태 영감이지만 교육자로서의 자각과 긍지는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미숙함과 편견 때문에 벌어진 실패도 깨닫고 있었고, 반성도 하고 있었다.

원장은 필사적으로, 그가 귀족이나 메이지에게 품고 있을 불신과 혐오감을 사그러들게 할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양의 룬을 지워주지 못하는 한 양을 설득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양의 룬을 지울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미스 발리에르가 메이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 외에 차선책을 생각해보기는 했으나 어떤 것도 할케기니아의 귀족제도를 게르마니아의 그것처럼 무너뜨리는 일에 직결될 뿐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인가…”

자기가 구세대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스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무도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알비즈의 식당 위층을 홀로 삼아 『프릭의 무도회』 는 막을 올렸다. 바로크 음악과 비슷한 악단의 연주에 맞춰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차려 입은 젊은 귀족들이 우아하게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 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 양. 이것도 닦아줘.”
“네. 거기 놔 두세요.”

양은 주방에서 메이드들이 가져온 술잔과 접시를 닦고 있었다.
먼 곳에서 무도회의 음악이 들려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봐, 양.”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던 델프링거의 목소리였다.

“너, 무도회에 안 가도 괜찮냐?”
“춤은 잘 못 춰. 그리고 난 귀족도 아니잖아.”
“뭐, 그것도 그렇구만… 아아, 모처럼 만난 『사용자』 가 이렇게나 재미없는 놈일 줄이야.”
“그거 안됐네. 뭐, 설거지가 끝나면 『사용자』 인가 뭔가에 대해서나 좀 가르쳐 줘.”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양은 느긋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닦는다.
그의 주변에선 평민인 메이드와 요리사들이 쟁반을 옮기거나 케이크를 담고 있었다.

“아, 시에스타 씨! 술잔 설거지 다 끝났어요~”
“네~ 아, 양 씨. 입구에서 누가 부르던데요.”
“네?”

주방 입구에 눈길을 돌리니 검은 드레스를 입고 긴 초록색 머리를 핀으로 올려 묶은 롱빌이 서있었다.



본관 탑 아래 광장.
위쪽에선 무도회장의 빛이 테라스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
롱빌은 양을 광장의 한 가운데로 데려갔다. 무도회장을 올려다보면서, 양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먼저 입을 연 건 양이었다.

“왜 아직도 학원에 있는 건가요? 이제 여기에 볼일은 없지 않은가요. 남아 있어봤자 원장의 성희롱에 계속 시달리게 될 텐데요.”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 있는 빗으로 올려 묶은 롱빌의 머리카락이 약간 흔들렸다.

“… 당신 때문이야. 알면서 물어보는 거지? 지금 내가 학원에서 사라져 버리면 푸케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녀석들이 나타날 거라는 거.”
“뭐… 그것도 그렇군.”

얼버무리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양.
롱빌은 어깨너머로 돌아보고는 슬쩍 양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그래서 사건이 잊혀질 때까지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성희롱에 견딜 수밖에 없어. 그러니 당분간은 당신과도 사이 좋게 지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왔어.”
“… 미안하지만 무도회의 권유라면 사양할게. 난 루이즈나 너희들 메이지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 하지만 귀족제도에 만족하며 살 생각도 없어.
뭐, 필요할 때나 써먹을 만한 때엔 이용해 주겠지만 말이야.”

양의 말을 듣고는 롱빌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사무적인 미소와도 다르고, 아침 무렵에 보여준 악의를 품은 미소와도 달랐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아무런 꾸밈 없는 미소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귀족이니 왕족이니 떠드는 놈들이 제일 싫거든. 깊이 들어가면 골치 아픈 얘기지만.
그러니까 귀족과, 메이지의 마력을 상징하는 매직 아이템만 골라서 덮쳐댔던 거지.”

한동안 해맑게 웃던 롱빌은 웃음이 가라앉자 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가늘고, 희고, 부드러운 팔을 보고는, 양은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고 말았다.

“왜 그래? 장군님씩이나 되는 양반이, 춤도 하나 제대로 못 춰?”
“아니, 그게… 실은… 으응. 엄청 못 춰. 아마 네 발을 밟아버리지나 않을까?”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인 양을 보고는 이번엔 롱빌이 배꼽을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서로 죽이니 어쩌니 하면서 싸워댔던 우리 사이에 발 밟는 거 정도로 우물쭈물 대서 어쩌자는 거야? 이리 와, 한 곡 추자고!”

말을 마치자 마자 롱빌은 양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 끌었다.
위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억지로 양을 잡고 휘두르는 듯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롱빌은 양에게 발을 몇 번이나 밟혀가면서도 즐겁게 춤을 추었다.
양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겨우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주방 입구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에스타와 로라를 위시한 메이드들이었다. 시에스타에게 안겨 있는 델프링거도 보였다.

“어머, 저 두 사람 사이 좋아 보이네? 시에스타아~ 너 우물쭈물하다간 그냥 지겠는걸.”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로라도 참! 난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고! 저런 멋없는 아저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니까!”

시에스타는 새빨개진 얼굴로 부정했지만 주위의 메이드들은 꺄아 꺄아 환호성을 울리며 계속 그녀를 놀려대고 있었다.
그 시에스타에게 안겨 있던 델프링거는 계속 불평을 해댔다.

“거 참… 한심한 사역말세. 이래선 무기점에서 썩고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만.”


테라스에서도 루이즈와 퀴르케가 광장에서 춤을 추는 양과 롱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으... 뭐 하는 거야, 양은!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주인을 팽개쳐두고 롱빌과 놀고 있다니!”

루이즈는 분홍빛이 감도는 긴 머리를 바레트 (역자 주 : 머리를 올릴 때 쓰는 커다란 장식용 핀) 로 묶고, 하얀 파티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오는 하얀 장갑이 루이즈의 고귀함을 한층 더 강하게 연출하고, 가슴 앞섬이 열린 드레스 덕분에 한층 더 작아 보이는 얼굴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입에 담고 있는 말이나 뾰로통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화를 내는 모습은, 연출로는 숨길 수 없었다.
퀴르케가 능글맞게 웃으며 루이즈를 놀려댄다.

“흐흥~♪ 괜찮으려나, 루이즈~ 이대로 놔뒀다간 너의 소중한 사역마를 저 비서한테 빼앗겨 버릴지도 모르겠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런 거, 내가 알 바 아냐!!”

그렇게 소리치며 휙 돌아선 루이즈는 팔짱을 끼고는 광장에서 시선을 돌렸지만, 차츰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 하, 하지만 메이지로서, 자기 사역마가 다른 메이지한테 학대당하는 건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어!”

루이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콩콩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테라스에서 사라졌다.

“정말로 그것 뿐이야!!”

마지막에 허세를 부리는 말을 한 마디 남기고서.


얼마 되지 않아 악단의 고즈넉한 음악이 흐르는 광장에선, 롱빌과 루이즈가 양의 팔을 서로 자기 쪽으로 잡아 끌기 시작하고, 거기에 시에스타가 끼어들어 두 사람을 말리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6화 : 롱빌의 사정 END
by 시대유감 | 2008/06/26 18:28 | 자주번역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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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地上光輝 at 2008/06/27 10:25
음...아무리 적이라지만 상대에게 반말을 하는 양은 좀 상상이 안 됩니다^^;
Commented by 시대유감 at 2008/06/27 10:44
저도 이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원문이 반말이라서 그냥 옮기고 말았습니다. 확실히 은영전의 양을 생각하면 좀 걸리는 부분이긴 했어요.
그쪽에서 양이 반말하던 상대는 율리안 민츠나 프레데리커 정도 밖에 생각이 나질 않으니...

하지만 그 둘을 제외한 대부분의 캐릭터가 양보다 연상이던 은영전과는 다르게 이쪽에서 양은 상당히 나이가 많은 캐릭터에 속하고,
여왕, 마자리니, 발리에르 공작 부부, 오스만 정도를 빼면 거의 톱클래스의 노인(...) 이죠. 롱빌도 물론 양보다는 연하일 테고요.
그리고 이 장면에선 '약점을 쥐고 상대방을 놀려대는 양 웬리' 이기도 하니 이거 쓰신 분도 일부러 반말로 가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후의 전개를 보면 롱빌과는 상당히 스스럼없는 관계가 되기 때문에 반말로 처리한 것일수도 있겠고요.

또 하나 고백하고 넘어갈 부분은 양의 말투인데... 이걸 적당히 능글능글한 타입으로 돌려버린 게 잘한 짓일지 못한 짓일지 저도 영 자신이 없군요.
혹시나 원작 쪽의 캐릭터랑 많이 어긋나는 해석을 한 게 아닐지 걱정인데 양 웬리 팬분들이 '나의 양웬리는 그러치 않아!!' 하시면 뭐 데꿀멍 해야죠. (...)
존댓말을 쓰는 부분에서도 私를 '나' 로 돌리느냐, 아니면 '저' 로 돌리느냐 등에서 좀 고민했습니다만 어차피 좀 있다가 반말 쓰고 빈정거릴 테니 그냥 '나' 로 가는게 낫지 않겠나 싶어서 그쪽으로 갔습니다. 이것도 지금 보니 많이 신경쓰이네요; 어차피 취미로 하는 졸역에서 쓸데없이 신경쓰는 거겠지만요. ^^;

아무튼 관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혹시 은영전 관련한 부분에서 신경쓰이는 부분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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